#요일프로젝트 #목요일 #걷기만하네 #모로가도모로코

여행 중에 만난 모로코인이 왜 모로코에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장기휴가를 받았으니 내 인생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볼까, 이왕이면 이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단편적인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짐 자무시의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서 뱀파이어가 사람의 피를 밀거래하는 탕헤르의 비밀을 간직한 듯한 음습한 골목. 질문을 한 사람에게는 영화의 한 장면 때문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워 대충 얼버무렸습니다. 하여튼 뱀파이어는 당연히/다행히 못 만났지만, 영화에서 본 듯한 메디나 골목은 실컷 걸었습니다(걸었다기보다 헤맸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하겠군요).

메디나는 모로코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 중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도시가 메디나를 품고 있습니다. 메디나는 과거 적군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성벽 안에 지은 도시를 말하는데, 지금은 구시가지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도시는 이를 중심으로 점차 확대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메디나는 차량이 진입할 수 없는 좁은 골목들이 복잡한 미로를 이루고, 리아드식 전통 가옥들이 빼곡합니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곳은 여전히 모로코인들의 삶의 터전으로 기능합니다. 골목마다 난전이 차려지고 사람들과 고양이들이 뒤엉켜 있고(무슬림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해요. 메디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캣타워예요) 아이들은 공을 차며 우르르 뛰어 다닙니다. 여행자들은 날 것의 활기가 느껴지는 메디나의 구석구석을 탐험합니다.

미로같은 메디나에서는 자칫 길을 잃고 헤매기 쉬운데, 특히 9,600개가 넘는 골목으로 이루어진 페스의 메디나는 악명이 높습니다(구글맵도 통하지 않아서 메인도로에서 불과 500미터 떨어진 숙소를 찾아가는데 40분이나 헤맸어요). 메디나에 거주하는 아이들은 관광객에게 길을 안내하고 팁을 요구합니다. 아이들은 관광객을 목적지에 무사히 데려다주기도 하고, 자신의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에 데려가기도 하고, 한참동안 미로 속을 헤집고 다니다 도망가기도 합니다. 페스의 메디나에서 같은 자리를 맴돌다 길 안내를 자청하는 아이를 만났어요. 내 이름은 미스터구글, 나만 따라와. 제가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해도 그는 아랑곳않고 저를 목적지에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 나한테 뭐 줄꺼 없니? (1유로를 주니까 이걸 어디에 쓰냐며 더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기도)

사실 모로코에서 ‘걷기’는 매우 피곤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호객과 캣콜링에 시달려야 했거든요. 미스터구글처럼 요청하지 않은 도움을 주고 돈을 요구하는 사람, 함께 사진을 찍자고 따라오는 사람도 있었죠(밤에 모르는 사람이 셀카봉 들고 따라오면 셀카봉이 무기로 보여요). 심지어 꼬맹이 패거리에게 성희롱을 당하거나 식당종업원에게 성추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무시와 경계로 대응했고 때때로 언성을 높여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로코여행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과 저마다 고유의 색과 매력을 지닌 도시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여행자가 마주칠 새로운 가능성이 도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에게 말을 걸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오지라퍼 모로코인들 덕분에 길을 나서면 우연한 만남들이 이어졌습니다. 불쾌하고 성가신 만남이 많았던 만큼, 유쾌하고 즐거운 만남도 많았어요. 저는 길 위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여행의 이야기를 만든다고 믿습니다. 이걸 ‘여행의 맛’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척이나 좋아합니다(다만 이번 여행에서는 주변을 경계하느라 충분히 즐기지 못했어요.ㅠㅠ). 제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이야기가 없으면 금새 질리잖아요. 제 여행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사람들을 기억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모로코에 도착한 날, 카사블랑카의 모스크에서 만난 여자아이는 긴 파마머리를 파도처럼 출렁이며 저에게로 달려와 뽀뽀를 해주었어요. 이토록 격렬한 환대라니! 월드컵에서 한국이 독일을 2대 1로 이겼던 날에는 경기 결과를 알려주거나 한국대표팀을 칭찬하는 사람을 수십명 만났구요.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카페에서 친구와 커피를 마시다가도 길을 물어보는 저를 멀리 떨어진 곳까지 데려다준 젠틀하고 세련된 할아버지, 이슬람문화의 보수적인 부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청년들, 집회 참여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전교조(?) 교사, K-POP에 관심이 많아 저에게도 친절함을 보여준 대학생들, 호객과 캣콜링 때문에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저를 환한 미소로 무장해제시킨 히피청년, 두어번 마주치니 처음의 과묵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장난기 남실대던 세탁소집 아들… 모두모두 슈크란!

풍년
지난주 빵꾸를 스압으로 메꾸었습니다(하하). https://youtu.be/IBDJQF3EXpU
네지다노프
골목을 걸으며 이 음악을 들으면 바로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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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슈크란! ㅎㅎ 모로코가 여자혼자나 여자무리끼리가면 여행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다사다난한 불편함이 따랐지만 그럼에도 여행의 재미를 발견하셨겠죠? ㅎㅎ 생각나시는거 또 공유해주세용 ㅎㅎ
풍년
카라블랑카, 마라케시, 페스, 탕헤르 같은 큰 도시들에서 스트레스를 좀 받았는데, 인도에 비하면 뭐... 이런 생각을 하니 견딜만 하더라구요. 이런 걸 처음 경험한 친구는 엄청 힘들어했어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고. 요일프로젝트를 통해 여행이야기 계속 공유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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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지다노프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참 멋지세요. 전 싫은 부분이 있으면 완전 정이 떨어져 오는 스타일인데. 결국 애정어린 시선이 중요한 듯 해요. 인문학자셔요. ^^
풍년
제가 고생한 걸 잘 까먹고 그러다보니 또 고생을 사서 하고... 애정이라기보다 그냥 이런 패턴인 것 같아요(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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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짐 잠무시의 그 영화를 기억하며 모로코에 입국해서, 골목골목을 따라다닌 느낌이에요. 글로 여행하는 기분이 이런 거군요! 뽀뽀해준 어린아이, 월드컵 분위기, 친절한 할아버지까지 (저의 편견이 만들어낸 이미지겠지만)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어요. 저도 시간의 흔적이 여기 저기 고스란히 남은 도시에 놀러가고 싶네요. 하고 싶은 거 리스트에 넣었습니당 😬
풍년
글로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니! 글쓴이로서 굉장한 칭찬을 받은 것 같아요. @씽 이 가보고 싶은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오래된 도시는 어디일지 궁금해요.
@풍년 ㅎㅎ 풍년의 글은 어쩐지 카메라로 찍는 느낌이 들고, 속도감이 느껴져요!
제가 사실 외국 도시는 잘 몰라서 ^^; 막 떠오르는 곳은 남미 페루 마추픽추 같은 곳이 떠오르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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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제가 남미 갔을때 이렇게 이야기 나눌 사람들이 옆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풍년
아직 남미여행의 기억이 남아있다면 부끄빠띠에 올리셔도 좋을 것 같아요!
@달리 님의 남미여행기 저도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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