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라인에만 작동하는 습관의 저주
마감 시간은 묘하게도 엄청 파워풀하다. 나도 모르는 에너지가 발휘되어 하룻밤의 기적을 만들어 낸다. 생각해보니 나는 늘 이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방학이 끝날 무렵 밀린 일기를 써대느라 방학 기간의 날씨를 찾아 신문을 뒤적이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험공부도 벼락치기, 꾸준한 공부를 해 본 기억이 없다. 약속 시각을 지키기 위해 마음 졸이면서 약속장소에 간다. 출근 시간도 역시... 정말 고치고 싶은 습관 중의 하나인데... 많이 노력했으나... 약속 시각을 되도록 정하지 않는다. 따위를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생겨먹은 나를 인정하자면서 지내왔다. 여튼, 2017년도 역시 나의 이런 습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해였으며, 올해 내게 벌어졌던 일을 기록하고자 한다.
올해 나의 가장 큰 이슈는 논문이었다. 5차 논문 학기의 시작!. 지난 학기에 경험디자인 수업을 들으면서 캣맘의 경험을 분석하는 것에 몰두했었다. 팀프로젝트로 진행된 수업이었는데 교수님이 하라는 대로 하니까 논문이 되었네? 오? 뿌듯함을 넘어서 디자인에 대한 관점에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이 수업을 진행했던 교수님을 내 지도 교수로 만들었다. 지향하는 바도 매우 비슷했고, 내가 관심 가지는 주제를 이미 연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초반 연구주제를 잡는 과정에서 지도교수님과 엄청난 캐미를 느꼈다. 물론 이 시기에도 미팅 하루 전에 몰아치는 써칭들이 이어졌고, 2주마다 진행된 미팅 후 엄청난 행복감을 맛보며 나의 인정욕구를 키워왔다. 그래서인가 난 그런 미팅 후에 3일씩 자는 경험을 한다.
1월
2017년의 시작은 이미 프로죄송러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내 미팅기록을 살펴보면, 올해 시작될 때부터 나는 미팅시간을 미루고 있었다. 이 시기에 나는 HCI학술대회 발표 때문에 숙소예약을 다 마쳤는데, 우리 키키가 두 번째 입원을 하게 된다. 심부전으로 인한 두 번째 폐수종, 그것을 치료하다 신부전까지 있는 반려견이다. 엄청난 식이요법과 약들로 케어가 필요했던 아이. (7개월 동안 잘 버텨주었는데...) 나는 절대 이 아이 핑계로 논문을 못 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구구절절하게 다 털어놓으며 발표만 겨우 한 채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버스 안에서 키키 핑계나 대고 있는 내가 어찌나 못났던지...
2월
이전엔 데드라인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면, 이 시기의 데드라인은 내 생각을 멈추게 했다. 사례분석 틀이 나와야하는데... 점점 시간 관리가 안되기 시작했다. 이런 생활습관은 데드라인을 코앞에 두고 벌어지는 사건 사고에 무방비가 된다. 그렇게 나는 약속된 시간을 못 지키며 나 자신 때문에 논문을 못 쓰고 있음을 고하고, 논문 진행을 천천히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는 메일을 보내게 된다.
3월
저 메일을 보낸 이후 나의 잠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죄어오는 압박을 느끼며 논문 잘 쓰는 방법 따위를 서칭해댔다.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한글자도 못쓴지 1달이 넘어가자, 꾸우님은 함께 논문 지도받는 학생들을 모아 발표하는 자리를 만드셨다. 이번에 발표 못하면 다음학기로 미뤄야한다는 생각에 사례분석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그동안 진행했던 이론들 다 때려넣어 발표했다.
4월
통장잔고가 바닥나기 시작했다. 키키 병원비로 인해 돈이 털리기도 했지만, 더이상 진도 1도 못나가는 상태의 시간을 내게 허락하기 힘들었다. 회사를 그만둔지 1년만에 퍼블리셔로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첫 출근하는 순간 깊은 안도가 밀려왔다. 이 안도감은 뭐라 표현하기 어렵지만 엄청난 안정감을 줬다. 자본이 나를 이렇게나 많이 지배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은 다시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정도로 내겐 큰 충격이었다. 이 시기에는 논문 심사를 위한 프로세스를 밟는 과정에 있어서인지, 자본이 주는 안도감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름대로 일과 논문을 병행하며 잘 지내었다. 그런데, 심사일정이 다가오자 오히려 나보다 교수님이 더 급해지셨다. 연구모형을 함께 고민해주고 떠먹여 주신다. 이런 감사함에도 불구, 또 다시 컨펌을 앞둔 주말을 망치면서 이번학기에 마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다음학기로 논문심사를 미룬다.
5월
논문 심사를 미루고 자체 휴가를 줬다. 2주간 논문을 안보고 쉬었다. 이런 상태가되면 리셋이 된다는 것을 몰랐다. 내 논문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기 힘들었다. 사실은 민주주의도 모르면서 민주주의 플랫폼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한심했다. 심사를 미뤘던 편안함 때문이었는지 ‘민주주의로 가는 길’ 이라는 강의를 신청한다. 그리고 구구절절한 메일로다가 리프레시를 하고 오겠다며 또 고했다. 이 시기에는 죄송이라는 말을 더이상 쓰기 힘들었다. 죄송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던 시기이다.
6월
4주간 강의를 통해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개념이 잡히기 시작했다. 칸트까지 파고든 내용들 정리해서 미팅 진행했다. 내 연구방향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던터라 이론적배경부터 새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친거지 이것을 말해버렸다. ㅎㅎ
7월
사회혁신포럼에 페차쿠차발표를 진행시킨다. 교수님은 나를 움직이는 방법이 발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8월
발표진행하면서 실험방향에대한 큰 그림이 그려졌다. 제책임님, 시스님, 블록체인OS 발제가 있던 nForum에서 시스님을 만났고 실험한다는 것을 알렸다. 흥미로웠던 발제들로 고민거리가 많은 채 생각만하고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리고 미트쉐어 가볍게 만나는 자리도 참여했었다. 뭔가 이 시기부터 우주당이 하는 일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9월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시스님을 만날 기회를 만들었다. 메일로 실험관련 설명을 보냈는데 엄청 이해도가 높았고 미팅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논문에 정신팔고 있을 동안 우리 키키는 계속 케어가 필요했고, 췌장염으로 또다시 입퇴원을 반복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시기엔 2주마다 진료받던 주기보다 더 먼저 아파와서 병원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결국 집에 산소발생기도 설치했고, 피하수액도 아침 저녁으로 진행했다. 논문은 추석만 바라봤다. 이시기에 몰아쳐서 할 생각이었다. 명절로 시골 내려가기 전날 우리 키키 상태가 많이 심각했다. 동생이 입원시켰고, 담당의사샘은 거이 마지막 케어가 될거라고 했다. 폐수종 치료 후유증이 어떤지 난 너무 잘 안다. 생명유지를 위한 최대치 이뇨제가 들어갈거고, 그러면 그나마 기능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신장은 그 기능마저 잃는다. 심지어 소변 배출도 못해서 카테터 시술이 들어간다고 한다. 나는 결정해야 했다. 안락하다는 안락사 정말 안락한지 뭔지 모르겠다. 단지 숨을 못쉬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볼때 나도 너무 숨도 못쉬겠더니만 고요해짐에 내 마음도 고요해졌다. 안도와 슬픔이 오락가락했다.
10월
부모님 집에 가서 장례를 치뤄주었다. 그렇게 흙이되도록 해주었다. 내 동생은 입이 :( 저런 모양이 되어서 안풀린다. 나도 그랬다 너무 이상했다. 추석에 논문 진행이 될리가 없었다. 뭔가 정신을 놓고 있었다. 집에와서 키키 약봉지 뭉탱이와 수액과 주사기들를 치우면서 펑펑 쏟아냈다. 요 생명을 내가 유지시키려고 어마어마한 화학적 케어와 맛없는 식이요법들로 너무 내 욕심에 고생시킨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후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이를 잃었다는 생각에 펑펑 그리고 내 몸이 너무 편안해저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학위논문 발표승인서 제출 기간이 다가오자 미팅 일정이 공지되고 논문진행이 거이 제자리였던 3명이 그루핑되어 지도받게 된다. 18일 미팅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논문에 집중하게 되었다. 논문에만 전념하는 일정을 잡았다.
11월
그동안 수요일마다 30분 일찍 퇴근해서 교수님과 미팅을 진행해왔었다. 11월1일 역시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면서 학교로 간다. 그런데 손이 후들거린다. 허기가 지고 뭔가 신체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뭔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 고생인가 싶었다. 그래서 혼자 분식집 라면하나 먹고 수업시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조사도구를 만들고 있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빠리바게트에서 미팅이 이루어졌다. 나는 이날 뭔지 모르겠는데 그냥 나 열심히하고 있어를 어필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여튼, 정리 안된 설문지를 보여드렸다. 연구 방법론에대한 질문에 한마디도 대답 못했고 멍청함과 무능함을 인증했다. 바리바게트 밖을 나오자마자 내가 질질 짜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 입밖으로 불만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미팅에서도 깨졌다. 그럼에도 난 실험이 진행되어야했기 때문에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함께 심사받는 동기들과 스타벅스에 출근하듯 모여서 논문을 진행했다. 독립러 고충토로 모임에서 실험에대해 설명했고, 파일럿테스트 결과를 들고 심사를 받았다. 심사결과는 재심을 받는 것으로 결정! 당연한 일이었지만 인정하는데 3일은 걸린 것 같다. 오전에 깨지고와서 슬라이드도 그날 만들어서 비를 뚫고 가서는 이그나이트 발표도 했고 너무 다이나믹한 11월 이었다.
12월
재심전 미팅과 심사위원의 싸인을 다 받았고 마무리만 잘 하면 되는데, 내 마음엔 또다시 위기가 몰려 온다. 그동안 미뤄둔 제일 어려운 부분을 해결해야 한다. 25일 크리스마스까지 말이다. 3일 남았다. 쫀쫀하게 긴장하고 최종 집중해야 할 시기이다. 2017년 마물한다고 다들 송년회 사진, 크리스마스 트리 꾸민거 올리는데 나는 여유없이 초초하게 2017년 살고 있다.당장 너무 시간이 필요하다. 2017년의 시간이 일주일만 더 있었음 좋겠다. 그럼에도 노마드 시위나 빠띠, 페북 SNS 중독에, 심지어 대림절 달력 작성까지 하고 있는 내가 이상하다. 저 2018년엔 이런 습관 고칠 수 있을까요? ㅜㅜ